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06/21 [18:20]
시흥시의 시민의식은 ‘시민리더십’으로
시민리더십에 기초한 시흥사랑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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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동욱(국립충주대 행정학과 교수)
▲     © 주간시흥

◈ 다소는 생경한 용어의 등장
 
삶의 많은 부분을 인터넷에 의지하는 세상이다. 글을 쓰는 경우에도 자연스럽게 인터넷 검색부터 한다. 시민리더십을 검색해본다. 속된 말로 건질 게 없거나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거의 전부다. 시민리더십이라는 말은 인터넷 세상에서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용어이다. 인터넷의 현실이 이러하니 시민리더십이라는 말이 실감나지 않고 다소 생경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편으로는 시민리더십에 매진하는 지역실천가의 역동적인 모습도 감지되곤 한다.

상충하는 두 사실을 놓고 혼자 끙끙대며 그 연유를 고민해본다. 시민리더십은 시민과 리더십의 합성어이다. ‘시민’과 ‘리더십’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분명한 말이다. 왜 둘이 합쳐지면 낯설고 무슨 소리인지 개념이 분명하지 않을까? 합칠 말이 따로 있지 도저히 합칠 수 없는 말을 합해놓은 것일까?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 두개를 합해놓고 조직의 역량을 쏟아내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몸에 쌓이고 배인 지식을 이것저것 헤아려본다. 기존 생각의 틀을 바꾸니 해답이 보인다.

지방자치를 시작하기 전에 지방분권은 교과서에나 있는 말이었다. 지방은 중앙의 예속이다. 모든 결정은 중앙에서 이루어지고 지방은 이를 답습하면 됐다. 지방의 독자적인 실체는 인정되지 않았다. 지방은 국가라는 전체의 한 부분으로만 존재했다. 데카르트-뉴턴 식의 물리학적 기계론의 패러다임이 지배한 것이다. 경쟁과 대립의 화신인 지배의 리비도가 세상을 움직였다.

세상은 아주 빠르고 강력하게 변했고 지금도 변하고 있다. 지금은 지방분권을 넘어서 지방주권조차 강조한다. 지방국가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쓴다. 부분의 합이 전체가 아니다. 부분이 곧 전체가 되며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이 지배한다. 세상은 점차 양자역학에 기초한 생물학적 지각론에 기초한 패러다임이 지배하고 있다. 시간과 생명을 존중하고 둘이 하나가 되는 감성과 희생의 리비도가 강조되고 있다.

부분이 곧 전체라는 말은 주체와 객체가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과 상통한다. 주체가 객체가 되고 객체가 주체가 된다. 이와 같은 새로운 인식틀이 가장 중요하다. 앞서 말한 지방과 중앙은 물론이고 예컨대 개인과 정부, 시민과 리더, 시민과 리더십 등을 새로운 인식틀로 보면 세상은 달리 보인다. 최근 각종 선거는 물론 정치공학 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트위터 정치는 ‘내가 나를 대표한다’는 세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으로 사이버 공간을 통해 되돌아가는 준직접민주주의(semi direct democracy)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개인이 정부가 되는 것이다. 시민이 리더가 되는 것도 당연하고 시민리더십 역시 가능해진다. 민주시민 사회의 요체가 주체성이 되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해진다. 객체가 주체가 되니 객체 역시 주체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식의 틀을 바꾸니 시민리더십은 끝없이 변하는 세상을 상징하면서 이의 최첨단에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된다. 시민리더십은 ‘앞서 가는 용어’이고 ‘세상변화에 걸맞은 용어’인 것이다. 오늘 시민리더십에 대한 담론이 중앙이 아닌 지방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환영한다. 정부가 아닌 자생적 조직에서 발아하고 꽃을 피우려한다는 사실은 축복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발전의 귀한 동력이다. 이는 역사가 증명해왔다,
 
◈ 간과하거나 제대로 모르는 사실들
 
이제 시민리더십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시민리더십은 물론이고 리더십에 대해 간과하거나 제대로 모르는 사실들이 여전히 있다. 이는 리더십의 본질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시민리더십 역시 리더십의 한 형태이다. 리더십과 시민리더십 양자는 그 본질이 다르지 않고 달라서도 안된다. 둘의 본질은 같기에 실은 하나이다.

뒤의 핵심 찾기에서 자세히 말하겠지만 우선 사전적 의미부터 생각해보자. 사전을 보면 'ship'을 명사에 붙여 상태, 신분, 수완, 직을 나타내는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면 리더십을 리더의 정신 정도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리더(leader)와 리더십(leadership)만이 아니라 친구(friend)와 우정(friendship), 학자(scholar)와 학식(scholarship), 시민(citizen)과 시민의 자격(citizenship) 등등 이러한 예는 제법 많다. 여기서 리더십의 본질을 찾아내야 한다. 그 이유는 모든 리더가 리더십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친구 모두가 우정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학자가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민이라고 모두 시민의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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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축구 선수들의 승부조작이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축구 국가대표선수까지 지낸 운동선수(sportsman)가 신성한 경기를 조작했다면 이는 운동선수 정신(sportsmanship)이 없는 것이다. 경기장에서 주심에게 감자바위를 날린 선수를 우리는 아직도 스포츠맨십이 없는 운동선수로 기억하고 있다. 경기만이 아니라 음주운전파문 등을 보여도 우리는 스포츠맨십이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경기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승복하는 아름다운 장면을 연출한 선수를 우리는 진정한 스포츠맨으로 생각한다. 사회에 선행을 베푸는 스포츠맨을 스포츠맨십이 있다고 간주한다.
리더와 리더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모든 리더가 리더십이 있는 것이 아니다. 리더로 있는데 감옥에 가거나 각종 추문에 휩싸이는 리더를 우리는 종종 목도한다. 이는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리더가 가져야 할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리더십은 있느냐 없느냐라는 존재의 문제이다. 리더십은 좋은 것이다. 좋은 것이어야 한다. 좋은 리더는 리더십을 제대로 갖춘 사람이다. 반대로 나쁜 리더는 리더십이 없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시민리더는 시민리더십을 지닌 사람이다. 리더는 자리로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리더십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서울대 공공리더십 센터의 김광웅 명예교수는 예전부터 리더를 옳은 일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옳은 일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리더라면 정의로운 일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리더십의 본질이어야 한다. 시민리더십도 이와 다르지 않다.

존재의미의 변화는 명칭의 변화를 가져온다. 그리고 시각을 고친다. 과거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면 문제는 문제를 낳고, 문제의 테두리에서만 맴돌 뿐이다. 문제의 본질에 들어가려면 인식을 달리해야 한다. 세상의 변화에 걸맞은 새로운 인식이 시민리더십이라는 사실을 새삼 강조한다.
 
◈ 시민리더십의 핵심 찾기 
 
시민리더십은 시민리더가 지닌 정신이고 이는 바람직한 것이다. 좋은 것이다. 이제 시민리더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정신을 찾아내는 일이 필요하다. 시민리더는 특수계급일까? 창조적 소수일까? 이끄는 집단일까? 큰 일을 하는 사람일까? 영웅일까? 관리자일까? 지배자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리더에게나 적합한 것이다. 리더를 창조적 소수, 특수계급, 이끄는 집단, 큰 일을 하는 사람, 영웅, 관리자, 지배자 등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난 세상의 유산이다. 나폴레옹이 예나 전투에서 승리하고 베를린에 입성했을 때 헤겔은 세계정신이 말을 타고 왔다고 감격했다고 한다. 리더는 이런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민리더는 이런 사람들이 아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시민리더는 세상의 변화에 앞서가는 사람이거나 적어도 걸맞은 사람이다.

이제 경쟁하고 대립하면서 중요한 책무를 국가나 정부나 맡아서 하는 세상은 지나가고 있다. 지배-복종이 아니라 감성과 희생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삼색신호등의 예에서 보듯이 공감이 중요해지는 세상이 열리고 있다. 예로부터 사람은 성안에 모여 동서로 뻗은 태양의 길과 남북으로 뻗은 바람의 길을 따라 오고 갔다 누구나 그 교차점인 중심에 다가가려고 애썼다. 거기에 권력, 부, 명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부와 명예는 중심이 아니다. 부와 명예는 원 밖으로 밀려나 있다. 이제 중심에는 봉사, 지식, 정보, 창조적 상상력이 자리하고 있다.

리더십은 힘을 지니고 있다. 권력은 힘이다. 힘을 제대로 쓰는 사람이 바른 리더다. 늘 힘만 주고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힘은 줄 때 주고 뺄 때 빼야 한다. 언제 주어야 할까? 바로 봉사할 때만 힘을 주어야 한다. 봉사할 때만 힘을 제대로 사용해야 태양의 길과 바람의 길의 중심에 제대로 있을 수 있다. 시민리더십은 봉사 할 때 힘을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시민리더는 바르고 정확하게 봉사하는 사람이다.


시민리더십은 ‘너와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용어’라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나 안에 있는 우리’와 ‘네 안에 있는 우리’를 위한 것이 시민리더십이다. 우리 각자에게 소중한 시공간 내지는 지역공간의 중요성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공공간이 사공간과 접합해 합공간을 넓히는 것이 시민리더십이다. 내가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보람 있게 만드는 날을 당겨주는 것이 시민리더십이다.

언론을 도배하면서 사람의 관심을 끄는 추태들의 본질을 생각해보자. 각종 추태는 힘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근본원인이다. 지위에서 나온 것이든 자신에게 고유한 것이든 지닌 힘을 옳은 일에 바르게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힘을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하면 그 힘은 정직하고 아름답다. “권력은 봉사입니다(AB OFFICIO AD HONESTATEM)”를 명심해야 한다. 봉사하는 권력은 정직하고 아름다운 법인 것이다.

조금은 어렵고 복잡한 얘기를 조금만 더 하자. 세상은 地本사회에서 資本사회를 거쳐 腦本사회로 변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내놓은 아이폰과 아이패드는 뇌본사회의 상징이다. 뇌본사회로 이행하면서 시민리더십은 ‘윤리적 뇌’를 중시한다. 희생과 봉사를 강조하고 역사를 바르게 인식할 것을 요구한다. 공공성을 우선가치로 하고 내면화시킨다. 시민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는 시민리더들은 현명하고 의롭다. 내일을 제대로 내다볼 수 있다. 세상을 아름답게 꾸밀 줄도 알 것이다. 소위 賢者의 리더십이 발휘되는 것이다. 논의를 다시 정리해보자.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윤재 교수는 시민리더십을 명예혁명에 비견하면서 주인의식, 도덕, 그리고 역사의식을 시민리더십의 핵심으로 강조했다. 귀한 참고자료이다.

정치나 행정학자들은 모두 주인의식을 강조한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다. 시흥시의 주인은 시흥시민이다. 정부 관료는 주인의 대리인들이다. 대통령은 주인인 국민의 대리인들 중 대장이다. 시흥시장 역시 주인인 시민의 대리인들 중 대장일뿐이다.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은 주인의 대표이다. 이들은 너와 나의 일은 아니나 우리의 일, 공동체를 위해 일하라고 우리가 선택한 사람들이다. 어쨌든 우리가 주인이다. 이 주인의식은 선거 때는 나타난다. 평소에는 주인의식이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경쟁-대립, 그리고 지배-복종의 패러다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시민리더는 잊고 살던 주인의식을 살리고 실천하는 공동체의 참주인이다.

민주주의가 배반과 좌절의 시간을 겪던 시절 우리는 위정자들의 거짓말을 당연시했다. 지금까지 정치인은 양치기 소년의 속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정치인의 비도덕성도 그러려니 한다. 리더십이 없는 리더들의 행동은 비도덕적이다. 시민리더는 이들의 비도덕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들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행동 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리더의 도덕은 이런 것이다’라고 행동으로 가르쳐주어야 한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고 했다. 비도덕적인 행동에 대한 가장 큰 벌은 양심이 가책을 받은 것이다. 시민리더는 도덕을 제대로 알고 바르게 실천하는 의인이다.

선진시민사회는 모두 자기 역사를 자랑스러워한다. 지난 세월의 공과 과를 그대로 소중하게 여긴다. 큰 역사만이 아니다. 우리 동네와 지역의 역사부터 아낀다. 쉼없이 달려온 성장과 개발 속에서 우리의 역사인식은 길을 잃었다. 역사는 실험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정신이다. E.H.Carr가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 것은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정신이 살아있어야 생각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생각을 제대로 하는 사람은 철학이 있다. 역사를 통해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을 제대로 알면 미래를 바르게 조망할 수 있다. 시민리더는 늘 공동체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사는 哲人이다.
 
◈ 시민리더십 함양의 길
 
리더는 옳은 일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시민리더는 어떤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 둘이 아니고 정답을 찾기가 어렵다. 선례가 없기에 전범이 없는 탓이다. 그래도 시민리더십은 있는 것이고 바른 것이라는 것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앞으로 계속 정교하게 설계해야한다. 그래도 핵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함의가 가능하다. 핵심에 기초해야 시민리더십을 함양하고 실천하는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이는 지역실천가인 시민리더의 책무이다. 다만 몇 가지 제언을 덧 붙인다.

우선, 21세기 리더십은 공유하는 리더십, 팀 리더십, 파트너십이다. ‘불완전한 개인이 모여서 완벽한 팀을 만든다’는 옥스퍼드 탬플턴 칼리지의 전략리더십연구소의 경구는 새겨둘만하다. 독불장군은 없다. 리더십의 요소 중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주위에서 채워야 한다. 힘과 공, 그리고 정보를 나누고 함께 가야한다. 이것이 시민리더십을 함양하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이에 투철하면 지시, 명령, 통제, 분리, 경쟁은 자연스럽게 물러나게 된다. 물러난 자리에는 소통, 협동, 코칭, 추진 등이 자리한다. 중심이 없는 협동(centerless cooperation)이 가능해진다. 협력이 있는 곳이 곧 중심이 된다.

21세기는 창조의 세계다. 창조는 상상력에 기초해야 한다. 상상력은 학문세계를 구성하는 기억과 이성에 기초하는 법이다. 느닷없이 상상력이 생기지 않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은 없다. 평생 배우고 학습하면 창조자로 등극할 수 있다. 시민리더십은 창조의 세계에 기초한다. 상상의 나래를 한껏 펼쳐야 한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학습해야 한다. 하버드 의대 교수 하워드 가드너는 ‘미래마인드 ; 미래를 성공으로 이끌 다섯 가지 마음능력’에서 진짜로 성공한 사람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평생 공부하고 지식들을 종합하며 창조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아울러 이웃을 참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국가의 주인으로 시민의식을 갖고 행동하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다. 시민리더는 진짜 성공한 사람이니 행복한 사람이다.

시민리더십의 현실을 잠깐 살펴보자. 현재의 시민리더십은 인식과 실천 사이의 간극이 크다. 이는 당위(해야 한다)와 존재(현실, 실천) 사이의 간극이다. ‘해야 한다’에는 많이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한다’는 물론이고 ‘할 것이다’에는 주저한다. 나는 안하려고 한다. 부담은 안지고 혜택만 누리려고 한다. 간극이 큰 것이 비단 시민리더십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여기저기서 간극이 큰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아픔이다. 시민리더십에 관련된 간극에 대해서만 조금 더 부연해본다.

현재 나와 우리 사이의 간극이 크다. 내 안에 있는 ‘우리’와 네 안에 있는 ‘우리’를 생각해보자. 우리(we)는 내 안에 있든 네 안에 있든 같은 우리(we)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 둔감하다. 특히 네 안에 있는 우리는 동물적으로 무시한다. 나만 중요하고 나의 일에만 민감하다. 나만 중요한 것은 나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잘못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를 나 몰라라 하는 것은 결국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너와 나의 교집합이기 때문이다. 우리 없는 나는 절름발이고 존재가치를 상실한다. 바르게 사랑하면 나는 물론이고 그 못지않게 우리도 사랑하게 된다.

더 나아가 경제적 자본(성장과 물질적 풍요)과 사회적 자본(신뢰, 규범, 호혜, 관계 맺기)사이의 간극도 크다. 60년 전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의 하나였다. 전 세계 모든 나라 중에서 밑에서 10%에 속하는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지금은 위에서 10%에 들만큼 잘살게 됐다. 자랑스러운 역사다. 이는 경제적으로만 그렇다. 나라의 하드 파워는 분명 좋아졌다. 소프트 파워가 문제다. 소프트 파워의 하나가 사회적 자본이다. 신뢰, 호혜, 규범, 관계 맺기 등 경제적 자본 못지않게 중요한 사회적 자본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시민리더십은 바로 이 틈을 좁혀야 한다. 경제적 자본만큼 ‘우리’와 ‘사회적 자본’을 성숙시켜야 한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시민리더십은 스마트 리더십(Smart Leadership)이다. 이는 하드 파워와 소프트 파워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키는 리더십이다.
역사는 자유의 길이고 인생은 사랑의 길이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변하지 않은 진리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너와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해서(Non mihi, Non tibi, Sed nobis) 바르게 사랑하고 봉사하는 것이 시민리더십이다.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시민리더십은 바뀌는 세상이 요구하는 리더십의 정수이다. 더 이상 낯설게 받아들여서도 안 되고 주저해서도 안 된다. 시민리더십이 아름답게 꽃피울 때 세상은 더욱 살만해지고 흐뭇해질 것이다. 시민리더십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세상을 하루라도 빨리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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