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12/01/17 [19:47]
중국여인열전 - 측천무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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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위 황후 일당 측에서도 위씨 왕조를 세울 경우 황제의 위에 오른 경험이 있는 예종 이단과 고종의 막내 딸 태평공주를 지목하고 이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위 황후 일파와 가까이 지내던 병부시랑(국방차관) 최일용이 이런 움직임을 이융기 측에게 알려옴으로서 쿠테타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융기를 중심으로 한 쿠테타군은 군사를 이끌고 친위군 군영에 돌입하여 위씨 일족의 장군인 위선과 위파 등의 목을 베자 급보를 전해들은 위 황후는 도망쳤으나 병사들에 의해 목이 잘렸고 안락공주도 참수되었다. 나머지 위씨 일족을 모두 살해한 뒤 정권을 잡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중무로부터 양위 받아 상왕 이단(예종)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쿠테타의 주동인물인 이융기는 평왕에 봉해졌다가 황태자로 책립되었다. 예종 이단은 별로 유능하지는 못했지만 점잖은 인물로 그가 복위하는 데는 그의 누이인 태평공주의 힘이 컸다. 그녀는 측천무후의 막내딸로 성격이 침착하고 권모와 지략이 뛰어난 여인이었다. 측천무후가 살아있을 때 항상 자기와 닮았다고 칭찬한 인물로 이번 쿠테타에도 그의 아들 설숭간을 참가시키는 등 공로가 많아 사실상 그녀는 주인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점잖기만 할 뿐 별로 유능하지 못한 예종 밑에 태평공주와 황태자 이융기 두 실력자가 존재함으로서 궁중의 세력은 차츰 이들 두 파로 갈라져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고민하던 예종은 황태자에게 양위하여 두 파의 싸움을 종식시키려 하고 마침내 712년 황태자 이융기가 현종으로 즉위하고 예종은 상황이 되었다.

현종이 즉위함으로서 승부는 결정 난 듯 보였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재상이라는 중신이 7명이 있었는데 그중 5명이 태평공주파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태평공주는 이런 인맥을 배경삼아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태평공주파는 현종 암살이라는 최후수단을 동원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런 사실을 눈치 챈 현종은 태평공주의 타도를 서둘렀다. 태평공주가 존재하는 한 현종의 제위는 불안하기만 했고 이름뿐인 허수아비로 전락할 우려가 있었다. 당시 태평공주는 상황의 명령이라며 중신들의 임명권을 행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713년 7월 현종은 태평공주파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단숨에 그들 일당을 일망타진했다.태평공주는 어느 절로 도망쳤다가 3일 후에 돌아와 자신의 집에서 사사되었다. 태평공주가 죽음으로서 정권은 현종이 잡게 되었다. 실로 반세기 만에 정권이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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