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12/26 [16:07]
중국여인열전 - 측천무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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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위원장 김용일 © 주간시흥
705년 여결 측천무후도 세월 앞에는 어쩔 수가 없어 나이가 들어 병상에 누워 힘을 쓰지 못하자 당시의 재상 장간지가 친위군 사령관과 공모하여 친위군 5백 명을 동원하여 내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궁궐에 진입하여 와병중인 측천무후를 협박하여 제위를 황태자 이현에게 물려주게 하고 측천무후를 상양궁에 옮겼으나 705년 겨울 82세의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

705년 중종 이현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측천무후가 세웠던 주의 국호를 폐하고 당의 국호를 회복했으며 그의 아내 위씨도 황후로 복위되었다.
중종의 딸 안락공주는 무후의 일족인 무삼사의 아들과 결혼했는데 무삼사는 안락공주의 시아버지라는 자리를 이용하여 궁중에 출입하다가 위 황후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말았다. 그러나 중종은 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무삼사를 신임하게 되어 정치상의 문제까지도 상의하게 되었다.

위 황후는 제2의 측천무후를 꿈꾸며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인물을 제거하기 위해 무삼사와 공모하여 중종에게 재상인 장간지 등을 참소하자 중종은 위 황후와 무삼사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장간지, 최현휘, 환언범, 원서기 등 5명에게 각각 왕호를 주어 정치에서 손을 떼게 한 후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가 모두 사사했다.

위 황후는 자신이라고 측천무후처럼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며 황후에서 황태후가 되고 여황제가 되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연흠융이라는 사람이 위 황후의 음란한 생활을 중종에게 상주했다. 중종은 연흠융을 궁중으로 불러 힐책했으나 흠융은 위 황후의 음란한 생활이 사실이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연흠융은 위 황후 일당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중종은 이번 일로 인해 위 황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위 황후는 710년 고기만두 속에 독을 넣어 중종을 시해하고 중종의 유조를 빙자해 넷째아들 온왕 이중무를 황제로 내세우며 자신은 황태후로 섭정했다. 이번 중종 시해사건에 중종의 친딸인 안락공주도 가담했다. 안락공주도 그 나름대로의 꿈이 있어 어머니인 위 황후가 황제가 되면 자신은 황태녀가 되어 제3의 측천무후가 되겠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제2의 측천무후가 되겠다던 위 황후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중종이 시해된 8일 후 25세의 젊은 청년인 임치왕 이융기가 위씨 일족의 전횡에 분노를 느껴 쿠테타를 감행했다. 젊은 청년인 이융기는 일찍이 위씨 일족의 전횡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으나 신중을 기하자는 생각으로 기회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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