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12/20 [14:53]
중국여인열전 - 측천무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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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이현은 학식이 풍부한 인물로 주변에 학자들이 많이 몰려들었으나 측천무후로부터 황태자를 양위하라는 압박을 받지나 않을까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 모반혐의를 뒤집어쓰게 되었다. 황태자의 마굿간에서 수백 벌의 갑옷이 발견된 것이 증거가 되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파주로 옮겨졌다가 자결했다. 그러자 고종의 일곱째 아들 이현이 황태자가 되어 683년 고종이 죽자 황태자가 즉위하여 중종이 되고 측천무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측천무후가 집정하기 시작하던 660년 소정방을 백제원정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백제 토벌에 나서 3월에 출발한 소정방의 10만 대군이 바다를 건너 8월에 백제의 도성에 도착하니 김유신이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와있었다. 당군과 신라군이 합세하여 백제를 공략하자 백제는 견디지 못하고 의자왕은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고종은 항복한 의자왕을 접견하고 당나라에서 살게 했지만 얼마 후 병사하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함에 따라 고구려는 고립상태에 빠졌다. 이때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죽고 그 의 아들들 사이에 불화가 생겨 장남 남생은 그의 아들 헌성을 당나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자 고구려의 국력은 이미 분열되어 보잘 것이 없었다. 역전의 명장 이적이 668년 9월 평양을 함락시키자 고구려의 보장왕이 항복하여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에서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어 고구려를 다스리게 했다.

중종이 즉위함으로써 황후가 된 중종의 처 위씨가 자신의 친정아버지를 문하시중이라는 요직에 기용하려고 하자 크게 노한 측천무후는 중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쫓아내고 고종의 여덟 째 아들 이단을 예종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예종은 유폐생활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여 정치에는 관여하지 못했다.

690년 69세의 측천무후는 예종을 폐하고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주(周)라 하고 자신을 신성 황제라 칭했다. 측천무후는 이씨의 당나라에서 무씨의 천하로 바꾸었지만 제위 계승자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무씨 성을 가진 자들을 중용하여 무씨 세력 확장에 전력을 기울이는 한편 친정 조카 무승사를 제위 계승자로 삼으려 했으나 원로 재상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하지 못하고 자신이 낳은 넷째아들 여릉왕 이현을 불러들여 황태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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