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시흥 기사입력  2011/12/13 [11:46]
중국여인열전 - 측천무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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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일 편집위원장     © 주간시흥
당 태종 마지막 해인 649년 태종의 병이 날로 악화되어 가던 어느 날 황태자 이치는 태종이 와병중인 취미궁으로 병문안을 갔다가 거기서 시중을 드는 한 궁녀에게 반해버렸다. 이 궁녀가 훗날의 측천무후로 당시는 미랑이라고 불리는 아주 낮은 신분의 궁녀였다. 미랑의 성은 무이고 이름은 조로 병주(산동성 문주현)출신으로 649년 태종이 병사하자 미랑은 머리를 깎고 감업사로 들어가 비구니로 살았다.

고종은 정처 왕씨 이외에 소씨라는 여성을 사랑하여 즉위와 함께 왕씨는 황후로 책립되었고 소씨에게는 숙비라는 직위가 내려졌다. 왕 황후와 소 숙비 사이에 고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지자 왕 황후는 소 숙비에게 기울어져 있는 고종의 마음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감업사에 있던 미랑에게 머리를 기르고 환속할 것을 명해 궁중으로 끌어들였다.

궁중으로 들어온 미랑은 고종과 황후의 사랑과 신임을 받아 소의의 자리에 올랐고 소의에 오른 미랑은 왕 황후와 한편이 되어 소 숙비를 모함하여 유폐시켰다가 나중에 죽여 버렸다. 그런 다음 미랑은 자신이 낳은 공주를 질식사 시켜 그 죄를 왕 황후에게 뒤집어씌워 고종의 노여움을 사게 만들어 미랑은 자신이 황후가 되기 위한 장애물을 제거해 가며 황후가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드디어 655년 미랑의 나이 32세 때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황후의 자리에 오른 미랑은 자파의 세력구축과 함께 정치에도 관여 해 날이 갈수록 권력이 강해져 고종도 그 기세에 눌릴 정도였다.

그러자 고종은 재상 상관의와 은밀히 모의하여 측천무후를 폐할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상관의가 처형되고 말았다. 이때의 황태자는 유씨 소생의 이충으로 측천무후는 이충을 폐하고 자신이 낳은 이홍을 세웠다. 겨우 5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성장함에 따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머니 측천무후의 뜻에 거슬리더라도 직언했기 때문에 측천무후가 탐탁지 않게 여겼다.

674년 측천무후는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황제, 황후의 호칭을 고쳐 천황(天皇), 천후(天后)라하고 세력을 더욱 키우니 고종은 아무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가 되고 말았다.

다음 해에 황태자 이홍은 궁중에 유폐되어 있는 의양공주와 신성공주가 이미 30세를 넘겼으니 빨리 결혼시켜야 한다는 상주를 고종에게 하자 고종은 기꺼이 황태자의 청원을 윤허하였다. 그런데 이 두 공주는 무후에게 살해된 소 숙비의 딸이어서 이 일이 측천무후의 비위를 크게 건드리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태자 이홍이 급사하는 일이 일어나고 이홍이 죽자 동생인 옹왕 이현이 황태자로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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